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머스 에디슨 (문단 편집) === 사업가로서 === >'''그의 발명품들은 현대적인 것에 대한 의미를 재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창조성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래를 약속했습니다.''' >His inventions not only reshaped modernity but also promised a future bounded only by creativity. >---- >[[타임지]], 1999년 송별호에 실은 [[올해의 인물|각 세기의 인물]] 중 19세기 인물로 토머스 에디슨을 선정하며. [[http://content.time.com/time/subscriber/article/0,33009,993037,00.html|기사 원문]] 청년시절 그가 특허를 내려 했던 의회용 전기식 투표장치는 소모적인 의회의 투표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지만 원래 모든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의회는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면 빠른 의사결정보다는 [[필리버스터|소수당의 의사표시]] 같은 타협의 과정을 더 우선시하는 터라[* 사실 정치에 정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다수당의 다수의견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보장도 없으며, 선거를 통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한 정당이라고 해도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다수당의 뜻대로 결정되는 것이 일종의 독단적 전횡으로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외면적으로는 지루하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정치적 투쟁과 타협 과정이야말로 가능한 한 좋은 결론을 내기 위한 노력의 일부라고 보는 경우도 많다.] 그 기계는 환영받지 못했다. 또한 조작 논란이 터진 시기라 조작의 가능성이 있어 반려당한 경우도 많다.[* 이와는 별개로 선거용 투표장치는 기계식/전기식 할 것 없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는데, 1889년 특허 신청된 기계가 미국에서 1990년대까지 지방선거에서 줄기차게 사용되었을 정도.] 자신의 순수 아이디어로 만든 기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을 안 에디슨은 그 이후 '''세상에 필요한 발명을 한다'''는 것을 모토로 삼게 된다. 에디슨은 본인이 신제품을 만드는 발명이 아니라 '''사업자로서 기존 남이 개발한 발명품을 쓸만하게 개선하여 상용화하고 보급하는 데''' 중점을 둔다. 대표적인 발명품으로는 [[축음기]](전축),[* 이 물건은 샤를 크로스도 만들었다. 하지만 샤를은 돈이 없어 결국 상용화에 실패한다. 하지만 에디슨은 상용화에 성공한다. 구조도 샤를의 것과 별 반 다를 게 없다.] [[영사기]](영화), 실용적 장거리 [[전화]], [[전구]],[* 정확히 말하자면 '''에디슨''' 전구를 발명한 것이다.] 전기 [[냉장고]]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세계 최초로 말하는 인형인 [[에디슨의 축음기 인형]], 에디슨 본인에게 최초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해준 티커테이프[* 증권시장에서 주가를 알려주던 종이테이프] 등이 존재한다. 이 때 [[조선]]과도 첫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1884년]] [[9월 4일]] 조선 조정은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에 첫 발전설비를 주문하여 1887년 3월 6일에 [[경복궁]] 내 건청궁에 전국 최초로 전등불이 켜졌다. 이때 냉각수를 궐내 연못에서 끌어다 쓰는 바람에 연못의 수온이 올라가 물고기들이 집단 폐사한 웃픈 해프닝도 있었다. 1892년 에디슨은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와 그것을 볼 수 있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 사실 진짜 발명가는 에디슨 회사의 직원이었던 윌리엄 딕슨(William K. L. Dickson)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용주였던 에디슨의 이름으로 특허가 등록되었다. 그리고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연구를 금했다가 최초의 영화 타이틀을 뺏기자 딕슨은 결국 에디슨과 결별했다.]해서 활동사진을 볼 수 있게 하지만 최초의 영화의 타이틀은 촬영기와 영사기를 이용한 [[열차의 도착|뤼미에르 형제]]에게 돌아갔다. 에디슨도 여러 사람이 모여 화면을 볼 수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영화 사업을 하면서 1908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동부지역에서 활동하던 10여개 영화사를 묶어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들어 시장을 독점하려 한다. 독점력을 무기로 영화 길이도 자기 마음대로 길어지지 않게 제재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여기에 반발한 영화인들은 에디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부의 한 깡촌에 자리잡아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는데 그 깡촌의 지명이 바로 '''[[할리우드]].''' 그 공로로 [[1960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했다. 자신이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지만. 다만 다른 의견도 있다. 당시 에디슨이 투자하던 것은 짧은 단막극 형식, [[니켈로디언]]에 올리는 간단하고 짧은 영화였지만 당시 영화의 주류는 [[유럽]]이었고 유럽으로부터 서사가 있는 장편의 영화들이 미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미국 내에서도 서사가 있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특히 [[서부극]]이 인기가 있었다. [[할리우드]]도 서부극을 촬영할 로케이션을 위해 찾았다가 아예 자리를 잡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할리우드를 건립할 쯤에는 MPPC의 영향력이 약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MPPC는 훗날 미국 법원으로부터 해산 판결을 받게 된다. 다만 씁쓸한 점이라면 에디슨은 최초로 영화 [[불법 공유]]를 --발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조르주 멜리에스]]의 영화 《[[달 세계 여행]]》의 필름을 유럽에서 빼돌려 미국에서 복사 후 전국에서 상영해 큰 돈을 벌었던 것. 에디슨은 [[라이선스]] 따위는 무시하고는 자기가 멜리에스의 필름을 쓱싹하고선 입씻어버려서 멜리에스는 미국에 영화를 팔지 못해 큰 피해를 보아야 했다. 당시엔 발명품들이야 특허로 저작권을 인정하는 세상이었으나 영화 같은 미디어물에는 저작권이 미비하던 시절이었고 이 때문에 영화 제작의 선구자들은 제대로 된 이익을 얻기 힘들었다. 《달 세계 여행》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의 요소들[* 컷을 나눈다거나, 셋트를 이용한다거나, 현실에는 없는 이야기가 있다거나 등. 소리와 컬러필름을 제외한 어지간한 영화적 요소들은 이 영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이 처음으로 시도된 대작[* 그러나 미적 가치가 있을 뿐, 어디까지나 단순한 상황극의 연속을 표현하는 수준이고, 틀을 갖춘 최초의 극영화로는 잘 인정받지 못한다. 또 그 직후 에디슨 회사 소속 감독이었던 '에드윈 포터'의 '대열차 강도'같은 괜찮은 영화도 나왔으나 어디까지나 틀이 갖춰진 극영화는 아니었다. 보통 틀이 갖춰진 최초의 극영화는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으로 간주한다.]으로 상업적으로는 오늘날 [[블록버스터]]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블록버스터 영화의 시조가 최초의 영화 [[복돌이]]를 탄생시킨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